
조광 (고려대 교수)
19세기를 전후하여 유럽과 미국의 제국주의 침략으로 제3세계 지역의 많은 국가들이 식민지로 전락했다. 식민지배는 피식민지에 대한 수탈을 자행했고, 피식민지 주민들의 생명과 존재에 커다란 위협이 됐다. 식민주의 아래에서 진행되었던 선교는 복음과 문화의 대립을 조장했으며, 토착문화에 대한 몰이해와 파괴를 당연시했다. 그러므로 식민주의는 범죄적 측면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 범죄적 측면에 대한 교회의 반성은 당연한 일이었다.
일본의 한국지배는 한국이란 국가와 일본이란 국가가 대등한 입장에서 ‘합방’했던 것이 아니었다. 일본은 한국 강제합병에 있어 합법적 절차를 무시했고, 한국의 황실이나 국민의 동의를 얻지 못했다. 이 때문에 당시 한국인들은 조약 체결 당시부터 조약 자체가 무효(null and void)로 파악하여 이에 대한 격렬한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식민당국은 이 반대운동에 대해 피의 보복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배는 국제법적 정당성을 상실한 범죄적 행위였다. 식민지배의 범죄행위를 보상하기 위해서는 식민책임에 대한 뚜렷한 인식이 요청된다.
한일 교회, 침략전쟁 부당성에 침묵
한국천주교회를 다스리고 있던 선교사들은 일본의 조선 지배를 합법적 행위로 파악했다. 따라서 ‘합법적 지배’에 대한 저항을 범죄행위로 보았고, 정교분리 원칙을 강조하면서 식민지배에 대한 저항을 단죄했다. 또한, 식민지 아래 조선천주교회의 지도자들은 일본제국주의 침략전쟁이 진행되던 과정에서 식민지 조선에게 강요했던 각종 정책에 협조했다. 예를 들면 당시의 교회는 신사참배를 허용했다. 이로 인해 많은 신자들은 양심의 괴로움을 느껴야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던 과정에서 일본과 조선의 천주교회는 침략전쟁의 승리를 위해 기도하면서, 침략전쟁에 대한 협력을 신자들에게 독려했던 반면에 침략전쟁의 부당성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말았다. 그 부조리한 현실에 눈을 감은 교회는 수녀를 꿈꾸던 대구지방의 어느 처녀가 전쟁터의 성노예로 전락했건만 그 문제점을 전혀 인식하지 않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 전쟁 도발자였던 독일교회가 자신의 방조행위를 참회했던 일이나, 독일의 침략에 협조했다고 하여 프랑스교회의 고위성직자들이 받았던 호된 비판은 현대 사회에서 독일과 프랑스의 교회가 바로 설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식민지에서 해방된 조선의 천주교회는 과거의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철저히 반성하지 않았고, 오늘날까지도 변명하고 있다. 일본교회는 원폭에 상처받은 나가사키의 성모상을 품어 안았지만, 침략전쟁의 수행에 대한 저항이 없었다는 사실에 좀 더 철저한 참회와 보속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한일 교회 하느님, 역사 앞에 고해해야
우리도 한국강제합병 100년을 기억하면서 하느님과 역사와 인류 앞에 우리의 어두운 역사에 대한 고해를 용기 있게 진행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한일 양국의 교회 지도자들이 한국강제합병조약을 비롯한 일련의 제국주의 침략조약들이 체결 당시부터 원천적으로 무효였음을 뒤늦게라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식민지 지배라는 범죄행위와 식민주의라는 오도된 이념에 침묵하고 동조했음을 고백해야 한다.
또한, 식민 본국이었던 일본교회는 일본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고서 식민지 지배에 대한 책임을 인류를 위해 기워 갚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한국과 일본의 교회는 식민범죄에 대한 참회와 식민책임에 대한 보상을 자신의 차원에서라도 실천해야 한다.
그리하여 한국과 일본의 교회는 서로의 아픈 역사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강제징용문제, 전쟁 성노예문제, 재일조선인문제, 조선인 피폭자문제 등 오늘날까지 현안의 사례로 남아 있는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는 데 더욱 적극 협조해 나가야 한다. 그리하면 한일 양국의 교회는 자신들의 겨레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사회적 외상(trauma)를 치유하는 데에 동참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과 일본의 교회는 한국강제합병 100년의 기억을 통해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하면서 좀 더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 태어날 수 있고, 화해와 상생의 미래를 함께 열어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