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상용 신부(예수회)
영원에 대한 그리움
먼 이국 땅에서 추석 명절을 맞는다는 것이 이제는 익숙해질 만도 한데 마음은 그러하지 않았다. 나는 아침 일찍, 내가 살고 있는 이곳 뉴욕 맨해튼에서 1시간 가량 떨어져 있는 형님 신부님 수도원으로 길을 나섰다. 한가위 명절 미사를 형님 신부와 함께 지내고 싶었던 까닭이다.
운이 좋게도 큰형 신부님과 함께 이곳 미국 동부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있는 나는, 간혹 어려움이 생길 적마다, 형님 신부님을 찾아 마음을 열어놓고 이야기를 나누곤 했는데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주어지는 것과는 별개로 형님과 함께 나누는 이 시간 자체가 나에게는 큰 은총이며 일종의 휴식과도 같은 소중한 선물이었던 것이다.
내가 탄, 뉴욕 시 외곽으로 빠지는 버스는 악명 높은 맨해튼 교통 정체 구간을 지나자 미끄러지듯 국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벌써 물들기 시작한 나뭇잎들을 쳐다보며 세월의 무상함을 가슴 저 한복판에서부터 매우 구체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내가 살아가는 주변의 시간들이 내 중심으로 시간의 간격을 맞추어 흘러가 주기를 무의식적으로 바랐던 것일까.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자신들의 시간을 벌여가는 사물들과 세상의 도도하기 그지없어 뵈는 이 시간의 흐름에 못내 서운해지기 시작했다.
이때, 내 마음 한 구석에 ‘영원에 대한 그리움’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나를 중심으로 흘러가기를 바랐던 이 시간들이 허무하게도 전혀 그러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나이가 되면, 이렇게 초월을 꿈꾸며 본인도 이해하기 힘든 어떤 전혀 다른 시간의 영역으로 나 자신이 진입해 들어가기를, 물에 빠진 이가 나뭇잎 한 장 붙잡듯 간절히 바라게 되고 마는 것이리라. 이렇게 나는 모호하고 막연한 ‘영원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형에게 갔다.
창조물 가운데 가장 마음에 안 드는 것
형 수도원에 도착한 후, 우리 두 형제 사제는 한가위 명절 미사의 주례를 서로에게 떠넘기려는 속셈으로 상대의 미사 주례를 너무나 간절히 기다려왔다는 농으로 그간의 떨어짐에 대한 형제간의 깊은 정을 대신하였다. 마침내, 내가 미사 주례를 하기로 하고 우리 두 형제 사제는 형님 수도원의 조그마한 경당에서 추수철에 들녘에 나가 있을 농부들의 노고와 그 수고를 사랑스럽게 바라봐 주고 계실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감사드렸다.
그리고 이미 하느님 곁으로 돌아간 그분의 백성들을 기억하는 우리 고유의 명절, 한가위 미사를 정성드려 봉헌했다. 두 사제가 텅 빈 신자석을 앞에 두고 이국 땅에서 봉헌하는 이 미사가 고요한 경당의 분위기에 조화되어 우리 두 형제 사제의 나즈막한 우리말 미사 경문이 약간의 공명음과 함께 그리도 아름답게 들릴 수가 없었다.
우리는 미사를 마치고 형님 수도원 근처에 있는 티오라티 호숫가에 산책을 나갔다. 마침 평일 오전이라, 사람들이 뜸해서 우리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소리가 이 산정호수에 메아리를 만들고 있었다.
먼 곳, 사람의 발길이 닫지 않는 호수 주변에 사슴 한 마리가 목을 축이고 있었고, 호수 주변으로 펼쳐진 은사시나무 이파리들이 노랗게 물든 채 파란 호수 표면에 그들의 화려한 색감을 소박하게 반사하고 있었다. 나는 뜬금없이 형에게 버스 안에서 가졌던 막연한 그리움에 대해 물었다.
“형은 영원함을 믿어?”
어이없는 나의 질문에 형은 줄곧 호수 주변을 맴도는 고추잠자리를 사진에 담으려는 시도를 내려둔 채 나의 얼굴을 한참 쳐다 보며 되물었다.
“영원?”
“나는 하느님의 창조물 가운데 가장 마음에 안 드는 게 바로 시간이야.”
그러자, 형은 그제야 내 의도를 알아챘는지 웃으며 농담을 했다.
“나는 하느님 창조물 가운데 가장 마음에 안 드는 게 바로 그런 태도야.”
우리들 발 밑으로는 호수 안에서 제법 커다란 물고기들이 노닐고 있었다.
“저 물고기들도 언젠가 까마득한 시간을 지나 생명감 없이 어느 화석으로만 남아 자신들의 자취를 대변하겠지만, 누가 관심이나 갖겠어?”
“너는 영원히 누군가의 관심을 받고 싶은 거네. 그렇지?”
“글쎄, 그 영원이 뭐냐고?”
우리들의 대화를 골치 아픈 무엇으로 여겼는지, 호수 건너편에서 우리를 주시하던 무늬 예쁜 사슴은 거뭇없이 자취를 감추고 빈 모래톱만이 휑뎅그러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우리의 시간대와 하느님의 시간대의 아름다운 균형
“나도 잘 몰라. 하지만 내가 바라는 영원은 인간 삶의 축이 하느님의 시간대에 기대어 있는 상태야. 이를테면 이런 거지. 너는 지금 우리 발 밑에 있는 저 물고기들의 미래를 까마득한 시간이 지나고 나면 생명감 없이 어느 화석으로만 남을 거라고 정의 내렸잖아.
내가 믿고 있는 영원은 화석으로 돌아갈 운명인 우리의 숨결이 하느님의 완벽한 사랑의 드라마인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늘 현재형으로 살아 숨쉴 수 있는 신비를 선물로 받았다는 거지.”
나는 형의 말을 알아들을 듯 하면서도 못내 모호함이 내 마음 안에 남아 있었던 까닭에 이렇다 할 대꾸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너, 기억나? 이곳에 지난 겨울 함박눈이 내렸을 때 함께 티오라티 호수에 온 거?”
“기억 나지, 그럼. 누굴 치매환자로 보나?”
“그렇게 온 세상이 하얗게 덮이더니 어느새 눈은 녹고 또 시간은 그렇게 흘러서 나뭇잎들이 새싹을 틔우고 순 연록색의 이파리들을 키우고 지금은 단풍을 입히고. 또 그렇게 낙엽을 만들고는 겨울을 맞아 또 눈을 흠뻑 이고 있겠지. 생각해보면, 영원은 돌고 있는 팽이를 지탱해주는 보이지 않는 균형과도 같아. 나는 그 아름다운 균형을 ‘하느님의 시간대’라고 부르기 시작했어.”
“……”
나는 머릿속에 뭔가 잡힐듯 미미한 의미들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팽이가 돌 때, 주변의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세계는 우리의 시간대이고, 엄청난 속도의 그 운동성에도 불구하고 팽이가 쓰러지지 않도록 항구하게 균형을 이루는 그 초월적인 어떤 힘이 영원이 아닐까.
나는 살면서 나의 삶의 축이 이 항구한 균형에 기대어가길 진심으로 바라.”
어느새 우리 주변에는, 젊은 연인들이 노오란 카약을 차에서 내려 조심스럽게 호숫가에 대고 있었다. 형은 말을 마치고 살금살금 고추잠자리가 앉아 있는 호수 난간 손잡이로 가서 카메라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러나 형의 그 노력에도 아랑곳 없이 고추잠자리는 훌쩍 자리를 뜨고는 푸른 가을 창공으로 훨훨 날아가 버렸다.
벌써 가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