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한 신부(요한, 작은형제회)
제목: 자, 입을 벌려 (Allez ouverez vous la bouche)
작가: 밀레 (Jean Francios Millet, 1814-1975)
크기: 74x60cm, 캔버스에 유채
소재지: 프랑스 릴 미술관
밀레, “철학을 지닌 예술가”
일반적으로 성화의 주제는 하느님과 성인들이 대종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작가는 이와 전혀 무관한 지상 삶의 모습에 있는 종교성의 의미를 발견해 작품화함으로써 우리 삶에 이미 들어와 있는 신앙의 가치에 눈뜨게 만든 예외적인 작가 중 한 사람이다.
밀레는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의 농촌에서 8남매의 맏이로 태어났다.
농촌에 태어났으나 많은 농토를 지닌 부모 덕분에 일찍부터 당시 유행하던 괴테나 셰익스피어의 문학 세계도 접할 수 있었다. 아름다운 자연환경에서 얻은 이런 지성적인 체험은 그를 단순한 예술가가 아니라 철학을 지닌 예술가로 성장시켰다.
그의 전기를 쓴 르동의 다음 말은 이 점을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
“밀레의 위대한 독창성은 한 인간 속에서는 좀처럼 조화되기 어려운 정반대되는 두 가지 능력을 같이 키웠다는 것인데, 즉 그는 예술가이자 철학자였다는 것이다.”
농부들의 삶, 철학적으로 성찰
이런 이상적 환경은 부모의 죽음으로 무너지면서 23세의 젊은 나이에 파리에 나와 생계를 위해 그림을 그려야 했고, 누드화에도 손대게 되었다.
35세 때 이런 생활을 접고 농촌인 바르지종에 안착하면서 그의 작품 경향은 획기적 전환기를 맞게 된다. 이때부터 그의 작품 주제는 자연스럽게 농부들의 삶과 농촌생활이 되었다.
여기에서도 가난은 여전했지만 그의 작품은 새로운 평가를 받게 되었고, 특히 미국인들에게 많이 팔려 나갔다. 덕분에 우리나라에도 서양화가로서 가장 먼저 알려진 작가가 됐다.
[만종]을 비롯해 [이삭 줍는 여인] 같은 작품은 웬만한 가정이나 심지어 이발소 같은 데서도 쉽게 접할 수 있어 우리들에게 통속적인 작가의 인상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통속적이면서도 자연과 자연을 벗 삼아 살아가는 농부들의 삶에 들어있는 의미에 대한 철학적 성찰로서, 단순히 자연을 그린 작가가 아닌 종교 화가로서 확고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
작가는 첫 번째 아내를 잃고 재혼해 9명의 아들을 얻었다. 이는 그에게 자연과 부부생활, 가정 안에 들어있는 신앙의 가치와 의미에 눈뜨게 했고, 그는 일상적인 삶을 통해 다른 어떤 작가도 표현하지 못했던 깊은 종교성을 표현했다.
부인이 연년생처럼 보이는 세 아이에게 음식을 먹이고 있다.
이 여인은 작가와 재혼한 카드리느 루메르 부인이며, 배경은 바로 작가가 살던 소박한 농가다.
부인은 젊은 나이에 맞게 붉은색 저고리이기는 하나, 당시 프랑스 농촌 부인들이 입던 수수하다 못해 농촌 티가 물씬 나는 검박한 것이다.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있는 부인은 출산 경험이 많은 여인에게서 불 수 있는 약간 비만한 모습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유행하고 있는 할리우드 영화가 만든 성냥개비처럼 날씬한 여인이 아닌 전통적인 어머니 상이며 성서에 나타나고 있는 다음과 같은 아내 칭송을 연상시킨다.
“네 집 안방에는 아내가
풍성한 포도나무 같고
네 밥상 둘레에는 아들들이
올리브 나무 햇순들 같구나.”
(시편 128: 3-4)
성서의 다른 곳에선 이상적인 아내 상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훌륭한 아내를 누가 얻으리오?
그 가치는 산호보다 높다.
남편은 그를 마음으로 신뢰하고
소득이 모자라지 않는다.
그 아내는 한평생 남편에게
해 끼치는 일 없이 잘해 준다.
우아함은 거짓이고 아름다움은 헛것이지만
주님을 경외하는 여인은 칭송을 받는다.”
(잠언 31: 10-12, 30)
어머니와 암탉, 교회의 모성 상징
시대의 영향일까? 오늘날 많은 엄마들은 어머니의 모습보다 할리우드 영화가 조작한 날씬함에 지나치게 집착해 어머니의 아름다움을 잊고 살아가지 않는가라는 아쉬움을 느낄 때가 있다. 이런 현실에서 이 여인의 후덕한 모습은 오늘 우리들에게 재생되어야 할 어머니 상에 대한 그리움을 일깨우고 있다.
새끼 새에게 먹이를 주는 어미 새처럼 부인은 숟가락으로 아이들 입에 무언가를 먹이고 있다.
부인의 곁에는 농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암탉이 한 마리 거닐고 있다. 그냥 서 있는 게 아니라 먹이를 찾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이다. 숟가락으로 아이들을 먹이는 어머니와 어울리는 모성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암탉은 성서에서 특별한 상징, 즉 하느님의 백성을 보호하고 키우는 교회의 상징이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병아리를 데리고 다니며 모이를 찾아 먹이는 암탉처럼 신자들을 아끼고 보살피는 것이다. 여기 세 어린이를 앉히고 먹을 것을 주는 어머니의 모습이야말로 암탉과 같은 교회의 모습이다.
그러기에 암탉과 어머니는 병아리와 자식들을 키위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는 공통점으로 인해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모습이 된다.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인자하심을 표현하는 그리스어의 ‘라하밈(Rahamim)’은 어머니의 태를 뜻하며, 하느님은 당신의 사랑과 자비를 이런 모성을 통해 드러내신다. 하느님께서는 어머니처럼 인간을 위로하시고(이사야 66: 13) 인간의 어머니가 자기가 낳은 아이를 잊을 수 있어도 당신은 결코 이스라엘 백성을 잊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다(이사야 49: 15).
성서는 인간의 구원을 너무도 간절히 바라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병아리를 돌보는 암탉과 자식을 키우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자주 묘사하고 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루카 13: 34)
그러기에 여기 세 어린이를 앉히고 먹을 것을 주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야 말로 교회의 모습이고 자비와 사랑의 하느님 모습이다.
작가는 두 번째 아내에게서 9명의 자녀를 얻었으며, 여기에 그린 아이들은 바로 작가의 자식들이다. 연년생처럼 보이는 세 어린이 중 왼쪽의 큰 아이는 이미 어머니가 주는 것을 먹고 만족한 표정으로 인형을 안고 있으며, 중간에 어머니의 숟가락을 삼키는 언니를 막내처럼 보이는 동생이 시샘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오늘 많은 가정은 여러 가지 이유로 자녀 출산을 꺼리면서 자식 하나를 낳아 온 정성을 다하지만, 그렇다고 올바른 모습으로 자녀들이 성장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아내의 현실 역시 어머니의 역할 만큼이나, 어쩌면 더욱 심각한 수준으로 날씬한 여자로 표현되기를 더 좋아하는 현실에서 이 어머니의 모습은 성서에 나타난 행복한 가정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성서에서는 어린이의 위상이 신앙의 본질을 설명할 수 있는 중요 주제로 등장하고 있다. 구약성서에서 어린이는 선천적으로 약하다는 이유로 인해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존재로 드러나고 있다. 하느님은 친히 고아들의 보호자이시며 그들의 권리를 찾아 주시는 분(출애 22: 21-23)으로 나타나고 있다.
신약의 예수님에게 어린이는 참된 제자의 상징이었기에 예수님은 인간이 어린이처럼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여야 함을 강조하셨다.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 19: 14))
집 뒤뜰에서 어떤 농부가 일하고 있는데, 이것은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있는 부인의 남편이다. 성서에서 남편은 남존여비의 사고방식이 우세했던 우리 동양의 사고방식 못지않게 대단해서 하느님은 자신을 남편으로 불렀다.
“너를 만드신 분이 너의 남편, 그 이름 만군의 주님이시다.”(이사야 54:4)
작가는 남편인 농부의 일하는 모습을 통해 하느님께 충실한 신앙인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작가에게 하느님이 주신 땅을 일구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었다. 인간 삶에서 노동은 하느님의 일에 동참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임이 성서에 자주 드러나고 있다. 요즘 강조하는 노동의 신성성은 이 가장을 통해 하느님의 일을 재현하는 것으로 강조되고 있다. 그러기에 가장의 노동은 바로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역할처럼 숭고한 것이다.
농장을 일구는 남편과 아이를 키우는 아내 사이에 암탉이 거닐고 있다. 암탉은 성서에서 하느님의 백성을 보호하고 키우는 교회의 상징이기에 자녀를 양육하기 위해 수고하는 부부의 의미와 일치됨으로 남편, 아내, 농부, 가정이라는 인간 삶의 기본 안에 들어 있는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하게 인도하고 있다.
작가는 너무도 통속적으로 보이는 농촌 가정 풍경에 깊은 신앙과 인생철학을 담아, 초월적인 존재를 통해 접근한 작가들과 다른 방법으로 신앙의 핵심에 접근하고 있다.
작가는 우리가 너무 평범해서 무심코 보아 넘기기 쉬운 자연과 농촌 가정, 부부와 자녀들의 삶에 들어있는 신앙의 고귀함을 발견하도록 독자를 초대하고 있다. 작가의 작품은 후대로 이어지면서 ‘바르비종’이라는 사실주의 화풍에 크게 기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