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상적으론 그저 단순히 “마음”이란 단어를 쓰고 있지만, 적어도 동양철학 안에서는 이 마음이란 단어의 내포와 외연 그리고 층차가 아주 다양하게 펼쳐지고 있다. 적어도 기독교적 사상에 머물고 있는 우리에게도 이 마음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신앙생활 내지 영적 여정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띤다.
주자는 리(理)와 심(心)을 분리해서 생각하여 성즉리(性卽理)라고 함에 반해, 왕양명은 리가 즉 심이라고 하여 심즉리(心卽理)라고 한다. 마음과 리의 관계를 놓고 볼 때 주자는 마음이 포함 내지 자각하는 대상인 리에 초점을 맞추고 강조하는 반면, 왕양명은 리를 포함 내지 자각하는 주체인 마음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에 시작되는 양자의 이 바늘끝 같은 자그마한 차이가 현실 세계에 가 다다를 때는 엄청난 간격을 벌리게 된다. 앎(知)과 행함(行)의 관계 내지 일치 여부에 대한 것이 단적인 예다. 주자는 선지후행(先知後行)을 이야기함으로써 오늘날 식자들의 지식과 행동이 따로 노는 병폐를 낳게 되기 때문이다.
“마음”에 대한 이해의 층위를 논할 때 “존재의 대사슬” 개념과 결부지어 이야기하면 이해가 좀 더 쉬울지 모르겠다. 주지하다시피 존재의 대사슬 개념에 의하면 모든 존재자는 하나의 커다란 체인을 이루고 있고, 맨 하위 존재인 물질부터 시작해서 몸(body), 정신(mind), 영(spirit), 성령(the Spirit), 신성(die Gottheit)에까지 다다른다.
여기서 우리가 “마음”이라고 할 때는 이 전 존재의 차원을 다 포섭하는 것이며, 세분해서 이야기한다면 각 층위마다 고유한 특성과 활동을 지닌 마음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저 마음이라고 할 때도 그것이 마인드 차원에서의 마음을 가리키는 것인지, 영의 차원에서의 마음을 가리키는 것인지, 신의 차원인 성령 차원에서의 마음을 가리키는 것인지 구분해서 알아들어야 할 것이며, 우리 일상의 삶 안에서도 각 층위에 맞춰 마음을 분별하고 움직여야 한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볼 때 주자는 리와 구분되는 심(마음)을 혼 내지 영의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지 그 이상의 차원으로 끌어올리지 않고 있다. 이에 반해 왕양명은 마음을 신의 차원인 성령 내지 신성의 차원에까지 끌어올려 받아들이고 있다. 자연히 인간에 대한 이해가 달라지기 마련이다. 특히 그리스도교식으로 표현한다면 창조주인 하느님과 피조물인 인간의 관계 정립에 있어 차이를 낳게 되는 것이다.
아주 거칠게 이야기한다면 주자가 알아듣고 있는 마음과 리의 관계는 세례자 요한의 관점과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리 즉 하느님이 객관적으로 혹은 외부에 엄연히 존재하고, 마음 내지 인간은 그 리 혹은 하느님에 맞춰 합당하게 살아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왕양명은 예수님의 관점과 일치하는 것으로서, 마음이 곧 리라고 함으로써 하느님과 인간이 둘이 아니고 하나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 바깥에 따로 리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표현을 빌리면 아버지와 당신은 하나라고 하시는 언명과 통한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의 전형이라고 생각한다면 예수님의 이 언명은 우리에게도 확장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이 곧 리라고 하다 보니 그 리가 혹은 하느님이 우리 마음 안에 온존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혹은 우리 마음은 그 리 혹은 하느님께 저절로 응하면서 살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살아내야 한다는 이 말도 당위적으로 요청된다기보다는 의당 그렇게 살아내게 된다는 말이다.
이러한 이해의 차이는 그 출발점을 떠나 일상의 삶에 다다라 연결해 볼 때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다. 주자의 관점을 따를 때는 객관과 주관이 엄연히 구분되어 나뉘고, 바깥과 안이 그러하고, 앎과 행함이 또한 그렇다. 그 결과 상대적 지평의 그 모든 것들이 분리되는 가운데 긴장과 갈등과 투쟁이 일어날 소지가 다분히 형성된다. 무엇보다 하느님과 인간의 분리를 초래함으로써 인간의 크기를 위축시켜 버릴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죄와 타락에 젖어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인 듯 알아듣게끔 하여 잘디잔 인간 이해로 몰아감으로써 이기적 욕망에 떨어지게 만들며 서로 간에 경쟁과 투쟁을 촉진시키는 병폐를 몰고 오게 한다.
이처럼 주자의 관점은 마음을 혼이나 영의 차원으로부터도 미끄러져 마인드 차원에서만 이해하려고 하는 현실적인 어려움을 낳기 쉽다. 허나 마음은 서로 다름을 주장하고 분별지에 탁월한 마인드 차원을 넘어서 서로 같음을 보고 일치와 통합을 이뤄내는 혼 내지 영의 차원, 나아가서는 신의 차원에까지 확장시켜 알아듣지 않으면 안 된다. 적어도 혼 내지 영의 차원에서는 상대 세계의 적절한 통합과 조화를 모색하기 때문에, 불편심(不偏心)의 경지를 통해 긍정뿐만 아니라 부정을 수용하는 가운데 좀 더 하나에로 근접하게 된다. 더 나아가 신의 경지에까지 다다라 마음을 알아듣게 되면, 글자 그대로 만물이 하나임을 깨닫고 그 맥락에서 움직이게 된다. 이쯤 되면 참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도 넘나들게 될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마음, 신성에까지 다다라 만유를 포함하고 있는 마음이 태곳적부터 있어 왔다. 그를 일러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느님이라고 이름 지어 불렀고, 노장에서는 도(道)라고 불렀다. 이 “마음”이 느껴지는가? 이 마음을 알아들음이 하느님을 뵙는 것이고, 이 마음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를 듣는 것이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아닌가.
유시찬 신부(서강대 이사장)
By 유시찬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