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과 죽음은 우주의 현실과는 뗄 수 없는 기본 바탕이다. 하루만 사는 하루살이부터 수천 년을 살 수 있는 캘리포니아 소나무까지 살아있는 모든 것은 죽는다. 여러분과 나를 포함해서 말이다.
죽을 확률은 언제나 100퍼센트다. 우주 자체가 그런 것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도 죽음이 예견돼 있다. “어둠, 어둠, 어둠, 이들은 모두 어둠 속에 사라질 것이다”라는 어느 한 시 구절처럼.
죽음은 진화의 엔진이다. 자연선택은 여러 종의 죽음을 통해 이뤄진다. 오늘날 살고 있는 종보다 더 많은 종이 멸종했다. 인간도 여러 종이 멸종했는데, 당분간 살고 있는 인간이 우리일 뿐이다.
죽음은 쇄신에 가장 필요한 기능을 한다. 기진맥진한 개인이나 혹은 종 전체가 사라져 새로운 종으로 대체된다. 죽음은 공간을 만들어내는 데 실질적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한 해의 모기떼가 죽지 않고 죽 살아간다고 생각을 해보라. 세상이 어떻겠는가?
역설적으로, 삶 자체가 죽음에 의지한다. 우리를 만든 분자는 죽은 별의 잔해에서 나온 것이다.
죽음은 바꿀 수 없는 우주의 법칙이다. 이는 바꿀 수도, 이겨낼 수도 없다. 죽음의 신이 모든 이를 살육한다.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사실, 우리는 죽음이 필요하다. 이것이 법칙이다.
하지만, 11세기 부활주일미사에 사용된 <파스카 희생 제물>이라는 제1 부속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장엄한 전투에서 죽음과 삶이 서로 겨뤘다.” 그리고 죽음이 한 번 이겼지만, 생명이 놀랍게도 다시 살아와 예상 밖의 승리를 거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간단하게 말하면, 삶이 규칙을 위반하고 부적격한 선수를 경기에 내보낸 것이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는 오순절에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에 사로잡혀 계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2, 23)”라고 했다.
모든 것이 죽는다는 법칙에서 유일한 예외는 하느님뿐이다. 하지만, 예수의 강생에서 하느님은 이 싸움에서 속임수를 썼다. 죽음의 영역에 죽지 않는 존재를 섞어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바로 죽음과 삶이 모두 이기는 “장엄한 전투”다.
하느님이 우리를 창조의 법칙에서 구제해 죽음과 예수의 부활로 이끄는 세례로 상징되는 새로운 시작을 한 것처럼 보인다.
분명, 이번 주 우리가 기념하고 있는 예수의 부활은 죽음을 끝내지 못한다. 창조에는 죽음이 필요하다. 하지만, 예수는 이런 세계에 새로운 가능성을 줬다. 바로 피할 수 없는 죽음을 겪고 난 후에 죽음이 없는 새로운 형태의 삶을 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성경과 전승은 우리에게 이 새로운 삶에 대해 거의 설명하지 않고 있고, 이것들은 서술적이기보다는 시적으로 묘사한다. 우리는 이것을 믿지만,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우리가 설사 이것을 알지 못한다 해도, 우리는 이것을 살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방법은 법칙을 깨는 것부터 시작한다.
죽음의 영역에서는 삶의 영역을 제한하는 많은 법칙들이 있다. 이런 법칙은 누가 창조의 풍부함에 들어갈 수 있는지 말해준다. 인종과 성, 국적, 지역, 사회적 지위와 위치, 혹은 몇몇은 특전을 가진 반면 의무만 있는 사람에 근거한 법칙이 있다. 이러한 법칙들은 죽음의 영역에서 제한된 법칙들이다.
하지만, 믿음이 있는 우리에게 이러한 낡은 법칙들은 힘이 없다. 하느님이 법칙을 깬 것처럼, 우리도 법칙을 깨 죽음과 그의 무리들이 가질 수 있는 것 이상을 갖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가질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삶이 아닌 그저 우리의 죽음이 돼야 한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법칙이라는 새로운 법칙을 따라 산다. 혹은 예수가 살았던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이기심 없는 사랑을 따라 살아야 한다.
세상은 우리에게 낡은 법칙에 순명하도록 요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기쁘게, 유쾌하게, 목적의식을 갖고 자신 있게 이 낡은 규칙을 깰 수 있고 깨야한다. 그러면, 우리는 승리자와 일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윌리엄 그림 신부, 도쿄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아시아 가톨릭뉴스 발행인이다. 일본의 가톨릭 주간지 <가토리쿠 심분> 편집주간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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