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과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 그리고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은 한때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지만 또한 가장 읽은 사람이 없는 책으로 꼽혔다.
이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한국에서 관객 수 500만 명을 넘은 최근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 현상은 과연 무슨 뜻일까?
이 현상에 대해 초기에는 정치적 관점의 해석이 많았다. 특히 우연히도 영화가 대통령선거일인 지난 12월 19일에 개봉된 것도 한몫했다.
대선에서 패배한 문재인 지지자들이 영화 속의 바리케이드, 그리고 혁명을 시도하다 죽은 학생들의 모습에서 깊은 공감과 치유를 느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러한 경험을 담은 블로그 글도 많이 나왔다.
문재인은 박근혜 당선인의 아버지인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독재 시절에 두 번이나 감옥살이를 한 바 있다. 또한 주인공인 장발장의 부당한 투옥도 과거 한국에서의 불의한 강압정치와 희생의 기억을 되살렸다.
나영미 씨(50)은 과거에 민주화를 위해 싸웠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울었지만, 특히 판틴의 운명이 인상 깊었다. 판틴은 장발장의 공장에서 일하던 직공이었는데, 미혼모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해고되고, 갈 곳 없는 그녀는 그 뒤에 창녀가 된다.
“나약하고 가난한 한 사람이 얼마나 쉽게 사회의 나락에 떨어질 수 있는지를 보며 울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대해 하재근 문화평론가는 좀 더 긴 한국현대사의 안목에서 레미제라블 현상을 분석한다.
노년 세대는 가족과 나라를 가난에서 구하기 위해 열심히 일을 했고, 더 젊은 세대는 민주화를 위해 싸웠지만, 이러한 한국의 성공적인 산업화와 민주화 뒤에 이제는 나이든 세대나 젊은 세대나 둘 다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해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레미제라블 같은 고전에 눈을 돌리게 되는데, 이러한 고전이 각자의 인생의 무언가 맺힌 부분을 건드릴 때 사람들은 감동을 받게 된다.”
한편, 이 영화의 예상을 넘은 성공에는 도덕적 교훈이 뒷받침되어 있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아빠와 함께 영화를 본 올해 10살인 박혜민(드보라)는 영화 속의 “신부님”이 장발장이 은그릇을 훔쳤음에도 또다시 은촛대까지 주는 장면이 가장 감동적이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해 줄 수 있는 환대의 극치였다”는 것이다.
레미제라블을 지난 1962년, 그리고 2012년에 두 번이나 완역한 정기수 서울대 불문학과 명예교수(84)도 이 지점에 일치한다.
그는 (짧게 나오는 영화와 달리) 원작 소설에는 첫 부분에서 뮈리엘 주교의 이야기가 무려 112쪽이나 나온 뒤에 본 이야기가 시작될 정도로 뮈리엘 주교의 이야기는 소설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근본 주제를 이룬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정 교수는 소설에 나오는 주교와 가톨릭교회는 특정 종교라기보다는 보편적인 도덕, 신앙, 종교의 이미지를 가리키기 위한 것이라고 본다.
실제, 레미제라블을 쓸 당시 위고는 가톨릭 신앙에 냉담한 상태였다. 그는 당시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프랑스의 민주주의를 파괴한 나폴레옹 3세 황제에 반대하는 운동을 펴다가 추방돼 영국에 20년간이나 망명했다. 나폴레옹 3세는 또한 “가톨릭교회의 보호자”를 자처하기도 했었다.
당시의 가톨릭교회 또한 위고와 레미제라블을 금서목록에 올려 가톨릭 신자들이 읽지 못하게 금했다. 레미제라블에 대한 독서 금지는 1959년에야 풀렸으며, 중세교회로부터 내려온 이 금서목록 제도 자체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끝난 직후인 1966년에 폐지됐다.
정 교수에 따르면, 위고 자신이 당시의 각종 가톨릭 언론매체에서 레미제라블을 비판한 기사와 글을 740건이나 세었을 정도다.
그러나 현대 가톨릭교회의 관점은 레미제라블에 매우 호의적이다.
예를 들어 <가톨릭신문>은 지난 1월에 레미제라블 현상에 대해 실은 몇 개의 글 가운데 하나에서 레미제라블이 “가톨릭 문학의 최고 고전”이라고 평했다.
정 교수에 따르면, 인도주의자이자 정치가, 사상가였던 위고는 물질주의를 배격했으며, 가난과 무지가 “사회의 암흑”이라며 가난과 무지에 시달리는 이들에게는 공허한 설교가 아니라 실질적인 일자리와 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지금의 한국에서의 레미제라블 현상은 위고가 살던 시절의 프랑스 민중처럼, 한국인들도 지금 실업과 물질주의적 부패로 고통 받고 있기에 깊은 공감이 있다는 것이다.
By 가톨릭뉴스